by JJ/말

ELLE Korea 2012 11월호 <김재중, 인도 여행기>

오봄봄 2021. 2. 4. 13:05

 

인도 북부, 라자스탄(Rajasthan) 주의 알와르(Alwar)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험난했다. 델리 공항에서 네 시간 남짓 걸린다는 정보를 찰떡같이 믿는 게 아니었다. 촘촘한 시곗바늘을 잣대로 살아가던 사람들이 시간의 영원을 믿는 이들의 도시로 들어가는 관문은 만만치 않았으니 “<정글의 법칙> 찍으러 가는 거냐”는 불만도 당연했다. 램프의 요정 ‘지니’만큼 거대하게 흐물거리는 먼지가 일곱 시간 내내 밴의 꽁무니를 따랐다. 그 먼지 더미에 여명이 비치던 순간, 차창 밖으로 아잡가흐(Ajabgarh) 주민들의 아침 일과가 신기루 같이 어른거렸다. “인디애나 존스가 된 기분이에요. 과거로 모험을 떠나온 것 같아요.” 누군가 감탄사를 자아냈다. 하지만 수백 년 전 왕이 총애하던 별장 지대는 더할 나위 없이 가난한 촌락으로 쇠퇴해 건조하게 바스락거렸다. 몬순을 거친 작은 호수는 도토리묵같이 찰졌고, 사람들의 마음에 물기가 촉촉했던 건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아, 정말 어마어마한 나라네요.” 이정표도 없이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모굴 양식의 우아한 리조트에 들어서면서 긍정과 부정이 절반쯤 섞인 재중의 감흥이 쏟아졌다. 곧이어 천공의 성으로부터 울려 퍼진 듯한 리조트 스태프의 웰컴 송이 이어졌다. 구슬프고도 아련한 찬가에 이내 정신이 맑아졌다.


JYJ의 멤버 재중은 한 우물보단 재기발랄한 다양성에 주목한다. 경험과 이미지와 도전이 한 곳에 머무르는 걸 아직은 인내하지 않는 편이다. 우리의 로케이션이 인도를 주목한 것도 그가 가진 다양성에 대한 의지 때문이었다. 그동안 전 세계의 도시를 누볐던 그가 당도하지 못한 곳이 인도였다. 다행히 방랑하기 좋은 로케이션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렇게 모험은 시작됐다. 배우라는 타이틀이 꽤 걸맞은 그가 주목하는 가상의 세계 역시 다양성이라는 이슈와 맞물린다. 드라마 <닥터 진>에서 우직한 포도청 종사관 김경탁이 되어 플라토닉한 사랑을 테너 톤으로 선보였던 그는 같은 기간 영화 <자칼이 온다>의 허당 스타 최현을 넘나들었다. 잠이 부족했지만 감정에 트랜스를 달아놓은 듯 인풋과 아웃풋이 자유로웠다. 
“하필이면 같은 시기에 두 작품을 동시에 촬영해야 한다는 게 쉽진 않았어요. 여러 가지 캐릭터를 선보이고 싶었던 욕심이 컸고, 전혀 상반된 캐릭터를 선보일 수 있다는 점에 위안을 삼고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해야 했죠. 다행히 대사를 빨리 외우는 편이어서요. (진지하게)혈액의 흐름에 도움을 준다는 오메가 3을 많이 먹어서 그런 것 같아요.”


<닥터 진>은 사극이라는 점에서 다소 불편했다. 시도와 평가가 늘 평행선을 그을 수 없었기에 새로운 것을 즐기는 그에게조차 부담이 됐다. 시청자들이 주목하기 시작한 중반부에 이르러서야 태도를 달리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경쟁작인 <신사의 품격>을 즐겨보는 이들의 입에서도 종종 그 캐릭터가 회자됐다. 
“이번에 못하면 다음 작품에서 더 잘하면 되지, 하고 생각했더니 좋아지더라고요. 절대평가에서도, 저 자신에게도.” 


첫 사극이다 보니 어느 정도 캐릭터를 연구하고 촬영에 임한 김경탁과 달리 11월 개봉을 앞둔 <자칼이 온다>의 최현은 본연의 모습으로 임한 재중의 영화 데뷔작이다. 
“영화에서 진짜 많이 망가져요. ‘진짜? 저 정도까지?’라는 생각이 들 만큼 과장된 장면이 많아요. 온 몸으로 웃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엄청 거만하고 제멋대로인 가수인데 알고 보면 순수하고 힘든 과거사가 있는 남자예요. 스타가 되면서 자만하던 와중에 킬러에게 납치를 당하는 거죠.”


하루 동안에 벌어지는 톱스타 납치 해프닝 속 최현은 가수라는 포지션은 물론이고 재중과 닮은 점이 많은 캐릭터다. 현실감 있는 연기를 선보일 기회였다는 뜻이다.
“같은 가수잖아요. 스타라는 포지션이 폼 잡을 줄도 알아야 하는 반면 평소엔 순진하거나 ‘개구진’ 모습, 갖춰지지 않은 약간의 흐트러진 일상적인 모습도 갖고 있잖아요. 잠재돼 있는 모습들을 조금씩 꺼내기만 하면 되겠거니 했어요.” 


개인적인 친분은 두터웠지만 연기 스타일은 몰랐던 상대 배우 송지효와의 호흡도 꽤 잘 맞았다. 

“장르가 코미디다 보니 테이크도 버전도 다양하게 갔어요. 감독님이 요구한 것과 별개로 지효 누나랑 ‘다시 한번 갈게요’ 했던 때가 많았어요. 잠이 워낙 부족한 시기였던 터라 모니터링하면서 ‘이건 안 되겠다’ 싶었던 적이 여러 번 있었죠. 반면 비주얼에 신경 쓸 여력은 없었어요. 물에 젖고, 비에 맞고, 전기 충격도 받았고, 암튼 살벌하게 망가졌어요.”


재중의 거듭되는 망가짐에 대한 기억은 연기에 대한 오픈 마인드와 연결할 수 있다. 제법 구사하는 일본어를 애써 어눌하게 표현해야 했던 일본 드라마 <솔직하지 못해서>로 연기에 입문한 그가 국내 드라마에 정식으로 데뷔한 건 지성, 최강희와 호흡을 맞춘 <보스를 지켜라>를 통해서다. 괴짜 여비서와 불량 재벌 2세가 출몰한 유쾌한 드라마였지만 그가 연기한 차무원은 그 발랄함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었다. 낯선 도전에 대한 얼떨함이 어쩌면 포커페이스 속에 묻어났을 수도 있다. 
“고충이 있었죠. 가수로서 노래하고 춤추는 재능과 연기의 재능을 똑같이 지닌 건 아니거든요. 그래서 차분히 쌓아가려고 시도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음악에도 소홀하진 않을 거예요. 표면적인 활동이 연기에 비해 줄어들긴 했지만 ‘연기하느라 노래가 줄었습니다. 음악적 감수성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하는 핑계는 대지 않도록 틈틈이 곡도 쓰고 음악도 많이 듣고 있어요.”


재능을 넓히는 건 좋지만 다른 재능을 위해 그동안 가꿔온 재능의 텐션을 놓고 싶진 않다는 의지는, 마땅히 이어가야 할 아이덴티티에 대한 고민을 놓지 않으면서 충실해야 할 시간을 즐기겠다는 다짐으로 바꿔 말할 수 있다. 
“음악도 처음엔 재능이 없었어요. 춤에도 노래에도 문외한이었죠. 트레이닝이 한몫 했지만 결국 실전 경험을 통해 많은 걸 흡수한 케이스예요. 연기도 다양하게 경험을 쌓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만족할 만한 연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지난 필모그래피의 현장들을 털털한 애티튜드로 관통해온 덕분에 “냉소적일 것 같았어” “성격이 별로일 것 같았어”하는 식의 선입견이 어느 정도 해소된 지점, 그의 연기자로서의 행보는 좀 더 유연해질 듯싶었다. 물론 선택을 통해 안게 된 고민은 계속하고 있지만.
“드라마 활동이 많아지면서 김재중을 알아봐 주시는 분들은 늘어나요. 그렇지만 해외 팬들에겐 JYJ라는 그룹을 건너뛰고 여전히 예전의 영웅재중으로 연결되는 점이 아쉽죠. 시간 문제인데 노력해 봐야죠.”


각자의 커리어를 쌓을 수 있는 상대적 기회 속에서 유기적으로 활동하는 JYJ의 세 멤버들은, 활동을 위한 차선일 수도 있는 시간을 가능성 있는 분야에 대한 정공법으로 맞이하는 중이다. 
“지금은 각자의 재능을 발휘하면서 자신을 성장시키는 과정이니까 우리 멤버들이 뭉쳤을 때 얼마나 큰 시너지가 있을지 기대돼요.”


다만 그가 아쉬워하는 현실은 관객들과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음악적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는 기회가 예전보다 많지 않다는 데 있다. 


“축제였어요. 축제!” 
남미와 스페인 공연의 농도 짙은 경험을 조금씩 희석시키며 떠올리던 그는 요즘 들어 인기나 환호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다.
“어릴 적엔 내가 잘하면 인기는 자연스레 따라오겠지 싶었어요. 지금은 내가 잘해도 그냥 오는 게 아니구나 생각해요. 떠날 사람은 떠나니까.”


더불어 9년이라는 활동 경력은 위기의식이라는 자연스러운 감정과도 맞물리며 팬과의 관계를 재구성하게도 만들었다.
“막상 그들이 사라진다면 심한 고독감에 빠지겠죠. ‘음악만 할 수 있다면 평생 이대로도 좋습니다’라고 하는 사람은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일 확률이 커요. 사랑받으며 음악 하는 게 얼마나 행복한 건지 모르는 거죠. 자신이 하고 싶어서 하는 것도 좋지만 누군가에게 해주고 싶어서 할 때 오는 만족감도 크거든요. 요리할 때랑 느낌이 비슷해요. ‘맛있게 먹어주겠지’ 하는 마음으로 만들 때의 느낌이랄까요. 그걸 들어줄 사람이 없다면 최악이죠.”


지난 인도에서의 나날을 돌이켜보면, 어떻게 알았는지 그가 묵고 있는 리조트임을 확인하고자 하는 인도 팬들의 전화가 매일 수도 없이 걸려왔고 이메일을 보낸 이가 있는가 하면, 심지어 머나먼 비포장도로를 달려 그 외진 곳까지 찾아온 소녀 팬들도 있었으니 당분간 그가 가진 위기의식이 현실이 될 리는 없을 것 같다. 
“지난 8, 9년이라는 시간을 체에 걸렀을 때 남아 있는 것도, 빠져 나간 것도 ‘영원’인 것 같아요. 우린 무궁무진하고 아직 할 게 많아, 그랬었어요. 어떻게 보면 지금과 같은 자세였죠. 그동안 커리어가 성장한 반면, 시간의 영원함이 다소 빠져나간 것 같아요. 인기와 명성과 부푼 희망과 도전 정신, 그런 게 영원할 줄 알았는데 생각과 다르게 위기는 언제든 올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죠. 남아 있는 ‘영원’의 에너지는 전과 같아요. 30대가 돼도 마음만은 20대로 살아간다고들 하잖아요. 전과 다른 거라면 두려운 게 생겼다는 거고 다만 도전에 대한 의지는 여전하다는 거죠.”


성숙한 이에게 여행이란 새로운 장소에서 느리게 흘러가는 삶을 경험하는 일이다. 하지만 성장의 가속도에 놓인 이에게 여행이란 다음을 계획하는 잠깐의 휴식일 가능성이 크다. 결국은 인생도 여행이고, 여행은 고독하다. 지난 역사 속의 헤리티지가 황량하게 펼쳐졌던 인도의 작은 마을은 그에게 ‘영원’의 부지불식간을 체감케 한 의미심장한 공간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돌아올 내일을 현실감 있게 고민하던 이 젊은 날의 여행은 예측 불허한 미래와는 관계없이 그에게 깊은 의미를 던질 게 분명하다.